Peter Saville
인터뷰
2020.03.27

그래픽 디자인계의 거장, 피터사빌과의 인터뷰

Peter Saville

대중 문화를 주도하는 일원이 되기를 꿈꾸었던 10대 소년이 영국의 걸출한 그래픽 디자이너 중 한명으로 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지금의 피터 사빌을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PETER SAVILLE

피터 사빌은 그래픽 디자인계의 거장이자 영국 대중 문화를 이끄는 주역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전설적인 포스트 펑크 밴드 조이 디비전의 Unknown Pleasures를 위한 레코드 재킷 디자인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 앨범의 노래들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당신이 이 음악을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앨범 커버는 봤을 확률이 높습니다
“외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마음에 들지 않았던 맨체스터 출신의 소년은 어떻게 문화와 이렇게도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요?

사빌은 “가장 타당한 이유는 내가 10대일 때부터 주변 사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었어요. 그 당시가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제가 10대 초반일 때는 1960년대였거든요. 그 때 제 주변 세계는 여전히 약간 구식이었어요. 흑백으로 구성되어 있었죠. 그리고 제가 살던 집도 오래된 앤틱 가구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러나 제 삶의 외부에서는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고, 사람들이 ‘제트 세트(jet set)라고 부르던 제임스 본드 영화, 비틀즈, 지미 헨드릭스, 카너비 스트리트와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60년대부터 중산층에서는 이런 문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저도 일주일에 세 번씩이나 007 골드핑거를 보러 갔었습니다. 저는 대중문화라고 불리우던 새로운 것들에 관심이 많은 10대였어요”
사빌은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인생의 동기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과 다른 입장에서의 인생을 보고 싶었죠. 소설이나 판타지 같았지만, 그 곳에 꼭 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에, 음악이 제 바람의 출발점이었습니다. 15살, 16살일 때 영화계에서 직업을 찾을 수는 없고, 패션에 관심이 많은 편도 아니었죠. 돈도 별로 없고요. 하지만 음반은 살 수 있어요. 그래서, 음악은 실질적으로 이 세계에 입장하게 된 첫 번째 요소였어요. 음반을 사는 것으로 시작되었죠. 그 후에는, 콘서트에 가게 되고, 실제로 누군가를 보러 가게 됩니다. 첫 번째로 갔던 콘서트는 1969년 – 제가 13살 또는 14살정도였어요. 저는 데이비드 보위라고 불리는 사람을 보러 갔는데, 그는 ‘블라인드 페이스’라는 최초의 록 슈퍼그룹의 찬조 공연을 하러 온 사람이었어요. 몇 년 후 1972년에, 보위는 저와 같이 스스로를 ‘발명’해 가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보위가 ‘스타맨’이라는 노래를 공연하는 TV 에피소드는 아주 유명합니다. 저와 같은 수 만 명의 10대들은 보위가 발명해낸 것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Ziggy Stardust]를 발명했었죠. 많은 어린 세대들이 ‘저 사람이 저걸 할 수 있다면, 나도 가능할 지도 몰라.”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보위는 사빌에게 정체성의 힘을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은 비틀스, 밥 딜런, 롤링 스톤즈가 지지하던 더 뚜렷한 정치적 성명들보다 확연히 다른 접근이었습니다.
“보위는 정체성과 자아의 창조에 대해 알려준 첫 번째 인물입니다. 대중문화에서 우리는 자아를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년 내, 보위는 [Ziggy Stardust]를 은퇴해 또 다른 페르소나를 창조했습니다. 이것은 교훈과도 같았습니다. 대중문화가 빠르게 움직이고, 그 속에서 우리도 빨리 움직여야 하며, 우리는 일종의 상품이라는 것이죠. 스스로를 상품으로서 창조해 낸다면, 새로운 상품을 디자인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문화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진화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중요한 교훈들을 10대일 때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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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리 레코드(Factory Records)의 시대

“팩토리 레코드는 마치 태양계 시스템 같았습니다. 개념적으로, 창조적으로, 실용적으로. 각 요소들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중력으로 모이듯 시스템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토니 윌슨(Tony Wilson)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는 에너지의 원천이었죠. 팩토리 레코드에 연관된 모든 사람들은 본인들이 각자 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소속 회사가 없었습니다. 연봉도, 사무실도, 직업도, 계약도 승진도 없었죠. 팩토리 레코드란 것이 사실 없었을지도 모르겠어요!
10년간 유지했던 주소는 누군가의 아파트였습니다. 토니 윌슨, 알란 에라스무스, 그리고 저는 1978년 12월에 팩토리 레코드를 설립했습니다.”
윌슨과 에라스무스는 “더 팩토리(The Factory)”라고 불리는 클럽을 조직하며 몇 달간 사전준비를 했고, 여기서 레이블의 이름을 따오게 된 것입니다. 사빌은 피처링 밴드들을 위한 포스터를 제작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는 “이제 막 미술대학을 졸업하는 참이었죠.”라고 설명했습니다.)

보다 진보적인 레코드 샵들의 진열대를 독립 발매 음반들이 채우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었습니다. 음반 제작 비용이 많이 들다 보니, 음반 당 약 1,000장 정도밖에 제작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제한된 공급으로 인해 한정판의 개념과 음반 소유자들이 수집가가 되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사빌은 이어 말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음반, 팩토리 샘플(Factory Sample)은 5,000파운드의 예산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모든 것은 아주 빠르게 일어났고, 아주 아마추어적이었으며 소요된 예산도 아주 적었습니다. 우리는 음반 5,000장을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완판 되었죠! 음반이 좋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당시 영국의 분위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도 레코드 매장에 가서 뭔가 기존과 다른 것을 보면 그게 1파운드 정도라도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음반을 구매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누군가의 희망과 진실을 볼 수 있습니다. 대중문화에서 시작된 진실이요. 젊은 문화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일부가 되었고, 대중문화의 아바타와 영웅들은 지나치게 부유해지고, 현실에 안주하면서 실제 세상과는 무관해졌습니다. 1975년에는 팝이 처음 생성될 때 개념으로는 설명 되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습니다. 쿠데타가, 혁명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바로 펑크(Punk)였습니다.”

Peter Saville

조이 디비전 (Joy Divison)의 등장

팩토리 레코드는 각 음반에 이름과 주소를 기록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 주소에 음반 회사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데모 테이프를 보냈습니다. 팩토리 샘플에서 피처링 한 밴드 중 하나가 조이 디비전이었는데, 이들의 앨범인 ‘Unknown Pleasures’는 포스트-펑크, 즉 새로운 물결을 가져올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음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버나드 섬너(Bernard Summer)는 천문학 책에서 어떤 이미지를 찾아서 다른 멤버들에게 보여줬어요. 그들은 그 이미지가 커버로 적합하다고 생각했고, 저에게 보내주었죠. 그 이미지는 처음으로 발견된 펄사(별의 일종)에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었어요. 난 그 전에 앨범 커버 작업을 한 적이 없었지만, 이걸 흑백으로 작업해야 한다는 느낌이 왔죠. 그리고 아주 좋았어요. 그때는 아직 컬러로 작업하는 방법을 아직 몰랐거든요. 그 이미지가 참 좋았었어요.”

“그들은 그걸 하얀색으로 표현하고 싶어했는데, 저는 ‘검은색이 낫겠는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검은색으로 이미지를 둘러싸고 이 이미지가 우주에서 온 것인 듯 표현했어요.” 디자인에 왜 앨범 타이틀이 없느냐고 사빌에게 물었을 때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게 음반 커버처럼 보이지 않기를 원했어요. 젊은 세대는 이름표가 달린 것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Unknown Pleasures의 커버 작업은 그런 감성을 따랐고 스스로 수집가로서, 소비자로서 원하는 대로 디자인했죠.”
사빌은 젊은 세대가 생애 처음으로 구매하는 첫 번째 예술이 음반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있어 음반들은 예술 컬렉션이었고, 그런 정신은 반복되고 있죠. 사빌은 음반을 디자인하기 전 Unknown Pleasures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는 매니저가 그 음악을 처음 들려주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전 앉아서 아주 천천히 그것의 의미를 깨달아 갔습니다. 새로운 시대 최고의 앨범임이 분명했고, 포스트 펑크 시대 최고의 앨범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내가 그 음반 커버를 막 작업했던 거죠! 네,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사빌에게 문화란 어떤 의미인가요?

“내가 나만의 일을 시작할 때, 바깥 세상에 대해 기쁘지 않았어요. 아주 멋진 측면을 발견하기도 했고, 그 뒤로는 버스가 상당히 실망스러웠고요. 버스 승차권이 실망스러웠던 거죠. 내가 자랐던 맨체스터에서는 매일의 생활이 지루하고 썩 좋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제가 3~4년간 미술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일상이 더 나아질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포스터 작업을 의뢰했고 저는 다른 포스터들과 다르게 보일 수 있도록 작업했습니다. 뭔가를 더 잘하려고 몇 백 년간 노력하는 사람들 – 축구선수, 음악가, 건축가, 변호사-이 모두 통합적으로 문화를 창조했습니다. 그 문화는 뭔가가 더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과 이를 위해 노력한 개개인의 산물입니다.

© Peter Saville and Joy Division
© Peter Saville and New Order